설교일2021.02.21 | 말씀고린도전서 1장 10-17절 | 설교자석기현 목사 |
2021.02.21 주일대예배
2021′경향의 강단(9)
같은 마음과 같은 뜻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석기현 목사
우리가 불신자를 전도하려 할 때 자주 듣는 핑계 중에 하나가 ‘교회 가봤자 교인들끼리 싸우는 꼴 보기 싫어서 아예 안 나간다.’라는 말입니다.
또 옛날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지만 목사와 장로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낙심하여 그 이후로 신앙생활을 그만 두었다는 소리도 흔히 듣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내의 분쟁은 예나 지금이나 교인으로 하여금 실족하게 만드는 이유들 중에서 몇 번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기독교인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같은 정당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하구한날 서로 싸우는 것이나 형제자매지간에도 부모가 남긴 유산 분배 때문에 평생 원수가 되는 일은, 뭔가 이권과 돈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런 현실적인 이익이 상충되는 일이 전혀 없는데도 왜 툭하면 그런 분쟁이 쉽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제일 처음으로 언급했던 것 역시 고린도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던 분열과 파당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전후서의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정말 수많은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 당장 해결되어야만 할 급선무가 바로 이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과 파당은 어떻게 해서 발발된 것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오늘날 역시 지상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분쟁이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예방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개인적 소견’을 내세우지 말고 ‘성경 중심’으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 기록하기를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고린도전서에서 39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바울 서신들과 비교해 볼 때 그 빈도수가 가장 높습니다.
이 호칭이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바울 서신들, 즉 로마서와 데살로니가전서만 해도 각각 19회밖에 사용되지 않았고, 다른 서신들은 훨씬 더 적은 것입니다.
즉 바울은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잃지 않는 가운데 엄중한 경책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교인을 권면할 때 이보다 더 간절하면서도 동시에 권위 있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신자라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권면을 들으십시오.’라는 말 앞에서는 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교인까지도 여전히 귀중한 형제로 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한 권위로써 그런 형제를 깨우쳐 주는 것 -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마땅히 시행되어야 할 권면의 참된 본질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라고 했는데, 이 ‘분쟁’이란 말은 ‘갈라짐’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린도교회가 벌써 현실적으로 나뉘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미 영적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으로는 이미 금이 간 상태가 교회 안에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균열이 점점 더 크게 벌어져서 교회가 완전히 쪼개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같은 마음’이란 생각하는 방식이 같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뜻’이란 한 문제를 두고 서로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일단 그렇게 속이 같아야 겉으로 나오는 말도 ‘같은 말’이 될 수 있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밖으로 나오는 말이 같으면 그 말을 내게 되는 속이 같은 것이고, 그처럼 속이 같으면 실로 나누어지려야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나오는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오든지 간에 항상 똑같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단체들을 보면 공식 대변인이라는 것을 두어서 자기 당이나 자기 협회의 입장을 꼭 한 입을 통해서 공적으로 알립니다.
그래야만이 서로 엇갈리는 소리가 나올 수 없고, 자기 단체의 단합이나 일치를 더욱 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말’을 해야만 그 단합과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의 ‘공식 대변’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강단에서 선포되는 성경 말씀’ -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말은 바로 이 설교, 이 유일한 공적 선포에 대하여 단 한마디라도 서로 엇갈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하는 말과 장로가 내는 의견이 교인들의 귀에 달리 들리는 일이 생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그 교회 목사의 설교 내용과 다른 교리나 당회의 결의와 상충되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고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 일들이 결코 생겨서는 안 됩니다.
밖으로 나오는 말이 다르면 이미 속에서도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 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들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선포하는 진리가 동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영적 사고 구조가 철두철미하게 같아져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그처럼 같은 말과 같은 마음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만이 교회의 유일한 공적 선언이 되어야 하며, 모든 교인들은 오직 그 성경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 말씀대로 간증하고 전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48년을 지내 오는 동안 정말 웬만한 교회라면 금세 쓰러지고 남았을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무리하게만 보이는 일들, 현실적으로 교회가 견디어 낼 길이 없어 보이는 역사들, 모든 교인들의 희생을 거의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사업들을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진행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경향교회가 저러다가는 곧 끝난다.’는 소리도 아예 첫 개척 시절부터 부지기수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경향교회는 IMF를 거뜬히 이겨내고 강서성전 건축을 완성했으며, 이제 마지막 고비처럼 들이닥친 ‘코로나바이러스’ 또한 줄기차게 극복해 내면서 희년을 지척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기 짝이 없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 원인은 모든 경향교회 교인들이 자기 개인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결속력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서로 제각기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진 개인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오직 ‘성경 중심’으로써 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특정 교역자에 대한 편애’에 빠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11절 이하 16절에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글로에”라는 교인에 대해서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지만, 어쨌든 고린도와 에베소 사이를 오가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글로에의 가족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렸다”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이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었다.’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그 소식이란 곧 고린도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발발시킨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곧 여러 교역자들에 대한 편애심이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에 대해서 사도들의 육성 설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 사도들의 목회 철학이나 설교 스타일이 교인들마다 “각각” 다르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설교의 주제 즉 복음 자체는 분명히 똑같은 것이었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 ‘같은 것’에는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그 대신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개성적인 차이에 빠져 들어가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교회 내에 아주 심각한, 큰 분열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원래가 학문이 풍부하고 성격이 온화한 데다가 그 영력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거기에다가 고린도교회를 설립했던 초대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던 그 시점에도 여전히 그를 흠모하던 교인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볼로” 역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도로 명성이 자자했고 성경공부를 잘 가르치는 은사가 특별했습니다.
그 역시 고린도에서 사역한 일이 있었다고 사도행전 19장 1절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 기간 중에 또 그를 좋아하는 교인들이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나중에 고린도전서 16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볼로더러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라고 ‘많이 권하고’ 있지만 아볼로는 계속 사양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볼로도 고린도교회 내에 그처럼 교역자들에 대한 편애 때문에 파당이 생긴 것을 알고, 자기가 지금 당장은 가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또한 카리스마적인 인격과 대중을 휘어잡는 설교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당연히 그 베드로를 만났던 기회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팬클럽이 고린도교회 안에 생겼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즉 자칭 ‘그리스도파’라고 부른 무리는 정확하게 어떤 그룹이었는지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언만을 중시하는 신자들이었거나, 아니면 남들이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는 것을 보면서 자기네들만 진정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자만하던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처럼 교역자들에 대한 제각기 다른 선호도 때문에 파당이 생긴 것을 듣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직접 “세례를 베푼” 교인이 적은 것을 두고 이제 와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는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신자가 된 자들이고 “스데바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이 몇 사람들에게만 직접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세례 주는 것을 자제한 이유는, 아마 자기는 순회전도자이니 자기와 개인적으로 너무 가까워지면 그 교인들이 다음 목회자를 영접할 때 방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접붙이게 되는 신앙생활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봐 조심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항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지만, 마치 유명 인사의 싸인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듯이, 다른 사람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직접 세례 받은 것을 무슨 큰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당시에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사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누가 어느 사도를 더 좋아하는가?’ 하는 이 문제가 극대화되면서 급기야 한 교회 안에 여러 파당까지 생겼던 것입니다.
교인도 사람인지라 어느 한 교역자를 더 좋아하는 일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교역자를 특별히 흠모하고 남달리 받들어 모신다고 하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진실하고도 열정적인 신앙생활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쉽게 나누어지는 것이라든지, 자기가 좋아하던 교구 교역자가 바뀌면 본인의 신앙생활도 흐지부지해 버리는 일들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 편에서도 자신을 남 앞에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교인을 오히려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특정 교역자를 따르는 것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귀히 모시는 것과 직결되는 것처럼 여기는 교인, 바로 이런 교인들이 나중에 교회를 갈라놓는 일에는 제일 앞장서게 될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결코 목사의 팬클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경향교회는 모든 교역자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정말 사랑하도록 사역하고 있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모임, ‘예사모’가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하경모’가 되어야지, 결코 ‘석사모’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를 통해 정말 훌륭한 교역자를 만나게 되었다면 그 목사님이나 강도사님이나 전도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에서 결코 그치지 말고, 그 교역자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짜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가까이 모실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은사주의나 기복신앙’을 따르지 말고 ‘십자가 은혜 중심’으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17절에 기록하기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세례를 무시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 세례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사명의 본질임을 밝힌 말입니다.
목사는 다른 종교의 사제들처럼 어떤 의식을 집례하는 것이 주요한 사명이 아니라, 말씀 선포와 복음 전파, 이것만이 주된 사명이며 최고의 사명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하신 사명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세례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의 중요한 두 성례 중 하나이지만, 그것조차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제일의 사명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도하며 세례를 준 목적은 자기 개인의 팬을 모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으로 이끌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시는 구속 사역에는 조금도 더할 수 없음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아까 13절에서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큰 복음 사역을 해도 그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를 베풀어 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신학자들이 쓰는 ‘바울의 기독교’라는 표현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그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이 펄쩍 뛸 노릇입니다.
아무리 여러 신약 성경을 쓰고 많이 전도해도 바울 자신에게는 대속과 구원의 능력이 전무했었고, 아무리 그가 세례를 많이 집례해도 바울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세례가 집행되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직접 세례 주는 것을 자제해 가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인에게 베풀어 주는 구원의 은혜만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 고심했던 것입니다.
물론 어떤 목사는 쉽고 재미있게, 어떤 목사는 강력하고 뜨겁게, 어떤 목사는 깊고 오묘하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지상교회의 목사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받은 “말의 지혜”를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렇게 사용하셨듯이, 오늘날의 전도자들 역시 로봇처럼 만들어 똑같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을 살려서 각각 다르게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설교가 은혜로운 근본적인 이유는 그 설교자의 ‘말의 지혜’ 때문이 결코 아니라, 그 설교의 핵심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은혜 중의 은혜’를 벗어나 다른 사소한 ‘은사’를 강조하거나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되면, 그 설교를 듣는 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그야말로 “헛된”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모든 교인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대속과 구원이라는 이 최고의 은혜를 똑같이 체험하고 똑같이 확신하는 영적 공감대를 나눌 줄 모르면, 그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지체들의 공동체를 이룰 길은 근본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보혈로 죄용서 받은 은혜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면, 그 교회가 갈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교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 그런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을 자리는 절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교인들마다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만 구하면서 그런 ‘기복신앙’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지체’가 되기는 고사하고 다른 우상종교나 미신과 오십보백보의 사교단체로 전락될 것이 뻔한 것입니다.
어떤 학생들이 학교에서 불량서클 따위를 조직합니까?
열이면 열 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제대로 안하는 학생들입니다.
정치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툭하면 탈당하고 신당을 조직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내린 용단’ 어쩌고 합니까?
같은 정치적 동지에 대한 의리와 신의는 고사하고 사실상 애국심부터가 결여된 사람들이 항상 그렇습니다.
한 단체의 일원으로서 제일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그 안에서 문제아요 싸움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의 제일 기본 요건인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교인들이 항상 교회 안에서 불량서클을 만들거나 교회를 쪼개어 나가는 것입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확실히 받은 성도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하려야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만들어 주는 가장 크고 중요한 핵심,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만큼은 꼭 확실히 믿고 간직함으로써, 그 십자가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이 교회에 확실하게 접붙여 있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어지려야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설명이 필요 없는 요지부동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그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출석은 하고 교인명부에 이름은 올라 있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원래가 붙어 있지 않으니 사소한 일만 생겨도 금새 나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단이 신자들을 시험하려 할 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작전이 바로 교회 내의 싸움입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막을 때나, 이제 막 교회에 등록한 초신자들을 낙심시키려 할 때에도 아주 잘 써먹는 작전입니다.
기독신자들이 그런 사탄의 약은꾀에 쉽게 넘어가는 못난이가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교회가 그런 사탄의 유치한 전법에 간단히 쓰러지는 약골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 싸움이 생기는 것이 다른 교인들이 다 못나서 그런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갈라지는 것이 목사가 똑똑치 못한 까닭이라고 책임 전가를 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에서도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도 남 욕이나 하고 앉아 있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바로 이 경향교회에서 실제로 영적으로는 나뉘어져 있는 교인이 아닌지 조심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 목회자를 편애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세상 지혜만 가지고 있는 사람 - 이런 교인들이 오늘도 교회를 나누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말씀과 같은 말을 하고 교회의 본체와 같은 마음을 공유하는 교인, 목회자에 대한 편애에서 그치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가 직접 만나는 교인, 세상에서 자랑하던 지혜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 은혜만 아는 교인 - 이처럼 참된 교회의 지체가 되어서 이 경향 제단을 더욱 굳건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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