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2024.09.22 | 말씀고린도전서 16장 1-12절 | 설교자석기현 은퇴목사 |
2024.09.22 주일대예배
경향의 강단(40)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고린도전서 16장 1-12절
석기현 은퇴목사
경향의강단(40)(2024년 9월 22일 / 주일대예배)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고린도전서 16장 1-12절 /석기현 목사
제가 2003년 11월 말인가 12월 초에 우리나라로 귀국한 바로 그날 경향교회 금요밤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제게는 경향교회 후임목사로서의 첫 예배출석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무슨 순서를 맡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리고 있던 제2성전의 제일 뒤쪽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회 도중에 한 서너 살 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제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저를 힐끗힐끗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게 될 때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는데, 나중에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특이한 조우(?)가 몇 차례 반복될 때마다 그 아이는 처음의 경계심을 차츰 풀면서 제 앞을 지나치는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이가 갑자기 제 곁으로 다가오더니 자기가 먹고 있던 ‘식빵 조각을 튀겨서 만든 간식’ 두어 개를 다짜고짜 제 손에 쥐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식빵 조각에 그 아이의 침이 꽤 많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 순수한 선의를 도저히 거절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경향교회 제2대 담임목사가 되어서 첫 성찬식을 집례하기 한참 전에 먼저 경향교회의 한 유치부 어린이한테서 ‘떡’을 받아먹는, 참 아이러니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제게 침 묻은 식빵 조각을 주었던 그 여자아이는 부인순 권사님의 따님으로서 지금은 우리 경향교회 대학부 S.F.C. 운동원으로 의젓하게 성장한 이한나 양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제가 경향교회에 부임한 후 제일 처음으로 받았던 ‘환영 행사’가 된 셈이었는데, 저는 그날 밤 이한나 어린이한테서 받았던 것과 똑같은 사랑을 지난 20년 내내 경향의 모든 성도를 통해 정말 분에 넘치도록 받으면서 제2대 담임목사로서 섬겨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다’라는 동사가 문단마다 몇 차례씩, 어떤 부분에서는 매구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가다’라는 말은 사도 바울 자신과 또 함께 동역하는 전도자들이 섬기고 있는 ‘복음 사역의 여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전도자의 행보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공감하고 협력해 주어야 마땅한지를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3대 담임목사님을 모시고 포스트 경향희년의 새 시대를 시작하게 된 이 소망스러운 때에, 새 담임목사님께서 그 중차대하고도 어려운 사역을 잘 감당하실 수 있도록 경향의 성도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도와드려야 할지를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인은 목사가 추진하는 선한 일을 위한 ‘헌금의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1절부터 4절에 “1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란 당시 이방 지역에 있던 초대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드렸던 특별헌금을 가리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기근과 박해 등이 겹쳐서 물질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라는 말대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헬라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 전체의 모든 교회에 특별헌금을 지시했습니다.
“매주 첫날”이란 ‘안식일 후 첫날’을 가리키며, 이는 초대교회의 정기예배가 안식일에서 주일로 옮겨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라는 말은 자유로우면서도 정성껏 헌금을 드려야 함을 가리키며, “모아 두어서”란 마치 우리 교회가 교인들의 헌금을 모아두었다가 정기적으로 노회에 상회비를 내거나 제네바신학대학원에 후원금을 보내듯이, 그 특별헌금을 전달해야 될 때가 올 때까지 계속 모아두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교회에 가게 될 때 비로소 부랴부랴 정성 없이 급조한 헌금을 형식적으로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미리 준비해 두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게 되면 “너희가 인정한 사람” 즉 교인 중에서 뽑힌 대표자에게 “편지” 즉 바울의 추천서를 주어서 “너희의 은혜” 즉 그 특별헌금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라고 한 것은, 아직은 불확실한 형편이 정리된다면 바울도 그 대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교회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에는 사도 바울의 이방 지역 사역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자들이 있었으며, 유대교 출신 신자 중에는 이방인 출신 신자에 대하여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방 지역 교회의 교인 중에는 그런 예루살렘교회를 달갑지 않게 보고 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시작한 진원지였고, 모든 이방 지역 초대교회의 모 교회였으며, 또한 예루살렘 총회가 모였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예루살렘교회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면서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결코 등한시하지 않도록 지도했던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선한 일이 계획된 것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요청을 하거나 총회 이름으로 무슨 공문서라도 한 장 보내와서 시작된 일이 아니라, 순전히 사도 바울의 판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그 헌금을 모아서 보내는 일은, 거기에 동참한 모든 교인이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그저 사도 바울 한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이방 지역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그 어떤 사사로운 감정 같은 것은 깨끗이 덮어 버리고, 오직 사도 바울이 ‘교회들에게 명하는’ 지시를 따라 기독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에 모두 힘을 모았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한인교회의 장로가 “우리나라의 대형 교회에서는 선교비가 목사의 개인 돈처럼 쓰이고 있다.”라고, 즉 ‘목사가 선교비라는 명목으로 자기 멋대로 교회의 재정을 지출하고 있다.’라고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교주가 재정출납까지 혼자 다하는 이단 교회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정상적인 제직회가 구성된 교회에서는 어림도 없고 특히 대형 교회일수록 재정 출납절차는 더욱 철저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장로라는 사람이 ‘큰 교회의 목사’인 까닭에 더 많은 세계 선교 사역을 후원하는 목사님들을 마치 ‘교회 헌금을 떼어먹는 사기꾼’처럼 함부로 비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경향교회의 교인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자기 뜻을 관철하거나 사적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찌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인들을 그 선한 일을 위해 힘을 모으도록 이끌어 가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인만이라도 목사의 이런 진심을 믿고 따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장로라 해도 무슨 특별헌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목사보다 먼저 하거나 당회에서 먼저 동의하는 장로는 없습니다.
특히 ‘다른 교회를 위하는 연보’나 ‘초교파적인 구제헌금’ 같은 특별헌금은 예외가 없이 목사가 제일 먼저 당회에 내어놓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항상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만 생각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경향교회의 담임목사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섬기기 위해 ‘연보에 관하여 명할’ 때마다 최고의 정성과 힘을 다해 기꺼이 후원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교인은 목사의 목회 사역에 힘을 더해 주는 ‘우군’이 되어야 합니다.
5절부터 9절에 “5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전도여행의 남은 여정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제3차 전도여행’의 원래 계획은 마게도냐를 가는 길에 고린도를 거쳐 가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그 계획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바울은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즉 마게도냐를 먼저 방문한 후 고린도에서 겨울을 나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는 어디까지나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혹...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라는 표현 또한, 아직까지는 이 계획이 확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계획은 나중에 다시 바뀌게 됩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바로 마게도냐로 갔다가 고린도는 거치지 않고 그냥 소아시아 쪽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예루살렘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방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오히려 덕이 안 될 것으로 바울이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 1:23). 하지만 적어도 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당시에는 만일 사정만 허락된다면 고린도교회에서 머물 뜻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이라는 말대로,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교회에 이례적으로 3년이나 머물렀는데, 그 사역이 끝날 무렵에 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에베소에 좀 더 오래 체류했던 것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는데, 이 말은 ‘지금 이 에베소에서 내가 복음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활짝 열렸다.’라는 뜻입니다.
사실상 그 에베소의 사역은 “대적하는 자”가 많아 어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바울은 그 호기를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오순절까지”는 머물러 있어야 하겠다고 스스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오로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지역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까?’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다음에는 나를 어디로 보내셔서 일하게 하실까?’라는 사명감에만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자신의 전도여행 계획을 알려 주면서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즉 그의 계획대로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게 될 경우, 그가 “갈 곳” 즉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도여행에 대해 그 고린도교회가 그의 마지막 환송지가 되어 주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항상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뜻’을 따라 자신의 걸음을 인도받고, 어떤 곳이든지 자기가 복음 사역을 더 효과적으로 더 크게 수행할 수 있는 길로 가고자 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사도 바울이 또한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보내어 줄” 교인들이었습니다.
아니 나중에는 고린도교회를 잠깐조차 방문하지 못하게 되었던 사정에 대해서도 조금도 오해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진심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교인들이 되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같은 훌륭한 사도에게도 그가 나아가고자 했던 사명의 길을 격려해 주고 그 사역을 위해 기도로써 지원해 줄 교인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주님의 뜻대로, 그 인도하시는 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목사가 걸어가는 사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 길을 격려해 주는 ‘같은 편의 군사’, 뒤에서 밀어 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교인들입니다.
담임목사가 새해에 교구담당 교역자를 바꾸게 될 때, 그것을 두고 섭섭해 하거나 불만을 품지 말고 그 교구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익이 되게 하려고 목사가 내린 결단임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부목사님 가운데 누군가가 개척을 하게 되거나 다른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되었을 때도, 그것이 그 목사님께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가는 사명의 길인 줄을 알고 기도로써 격려하고 물질로써 도와드려야 합니다.
우리 경향교회에서 주님께로부터 선교사로 소명 받은 목사가 나오면, 그 선교 사역을 후원해야 할 사람이 우리 경향교회 교인들이며, 그것이 곧 우리가 ‘경향선교회’를 중심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신학자가 되기 위해 더 공부하겠다는 목사가 있으면, 누구보다도 우리 경향교회 교인들이 가장 기뻐하면서 그 학업과 나중에 교수 사역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곧 우리가 ‘제네바신학대학원 후원회’를 통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나 S.F.C. 운동원이 앞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하면, 바로 경향교회의 교인들이 그 ‘별님’을 지금부터 열렬히 격려하고 힘껏 밀어주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우리가 ‘별들의 학교 후원회’를 통해 앞으로 더욱 힘을 모아야 할 일인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리는 곳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길, 그러나 동시에 ‘많은 대적이 방해하는 길’, 그런 길을 목사가 걸어갈 때 끝까지 그 목회와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밀어주는 우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인은 목사와 동역하는 다른 교역자도 똑같이 존중하는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10절 이하 12절에 “10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교회에 방문하기 전에 후배 목사인 “디모데”를 먼저 보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성품이 매우 온화했기 때문에 혹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를 무례하게 맞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심성이 착하고 온순한 목사를 오히려 더 함부로 대하면서 상처를 입히는 교인은 요즘 현대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라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특별 당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라고 사도 바울이 덧붙였는데, 이것은 디모데의 나이가 연소하다고 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를 조금이라도 얕보거나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경고한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디모데를 당연히 그처럼 조심하여 예우해야 할 이유를 가리켜서 바울은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비록 어리고 또 자기처럼 사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과 함께 복음 사역에 동역하고 있는 목회자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를 극진히 존중하여 맞이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라고 또 한 명의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이 아볼로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대로, 고린도교회 내의 파벌 형성에 본의 아니게 휩쓸리게 되었던 목회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당시 아가야 지방 즉 그리스의 다른 어떤 도시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 아볼로가 다시 자기네 교회로 돌아와 주기를 바울에게 요청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고린도교회 내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바울 자신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고린도교회 방문을 권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아볼로는 그런 종용을 거절했습니다.
본문에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라고 바울이 해명하는 것을 보아서, 아마 아볼로는 자기가 그 시점에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기뿐 아니라 자기의 동역 전도자인 디모데나 아볼로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실례를 범하거나 오해 없이 똑같이 존경과 신뢰로써 대해 줄 것을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년주일예배 중 우리 경향교회 부교역자들이 함께 교회 앞에서 인사하는 시간에 제가 성도들에게 ‘이 부목사님들과 강도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심방할 때 여러분은 이분들을 제가 직접 여러분을 심방한 것처럼 맞이하면서 그 권면하고 지도하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경향교회의 부교역자들은 바로 경향교회의 담임목사가 여러분에게 파송하여 여러분을 대신 가르치고 축복하게 하는 ‘담임목사의 분신’이나 같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가 교제하고 협력하는 다른 목사님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신뢰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 제신노회 산하의 다른 목사님들, 특히 약한 개척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목사님들을, 여러분은 자칫 하대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면서 여러분이 경향교회 담임목사님을 존중하는 것과 똑같이 존중해야 합니다.
몇 년, 어떤 때는 몇 십 년 만에 한 번 겨우 고국을 방문하는 선교사님을 대할 때, 비록 얼굴이 낯설고 이름조차 잘 모른다 할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그 선교사님을 무심코로도 무시하지 말고 그 짧은 귀국 기간만이라도 ‘평안히’ 지내고 크게 재충전하실 수 있도록 극진히 모셔야 합니다.
아직 국내에서도 무명에 가깝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경향교회에 큰 선물로 주신 제네바신학대학원을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로, ‘신행일치 순교자의 고장’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신학교 교수님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우리 제신노회를 중심으로 ‘주의 일을 위해 힘쓰는’ 귀중한 동역자로 알고 받들어야 합니다.
정말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를 귀히 여기고 존경하고 있다면, 그 목사님이 가까이 교제하고 함께 협력하는 다른 목사님들도 그와 똑같이 존중하고 대접함으로써 진정한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교인도 목사를 잘 만나야 하지만, 목사도 교인을 잘 만나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인이 목사를 잘 만나야 신앙생활에 은혜를 누리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목사 역시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목사라 해도 훌륭한 교인들을 만나지 못하면, 그 사역에 아무 힘을 얻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소명과 사역에 대해 완전히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훌륭한 목사가 좋은 교인을 만든다는 말도 맞지만 또한 훌륭한 교인들이 좋은 목사를 만들 수 있다는 말도 역시 성립되며, 결국 목사와 교인은 ‘같은 배를 탄’ 사이인 것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즈’(Band of Brother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시작하여 베를린 점령 때까지 그야말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미 제101공수사단 제506연대 소속의 이지중대(Easy Company)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 10회 시리즈 영화의 제일 마지막 편 마지막 장면에 이지중대의 중대장을 역임했고 나중에 연대참모까지 되었던 딕 윈터스(Dick Winters) 소령이 직접 나와서 엔딩 인터뷰를 했는데,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윈터스 소령의 어린 손녀딸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Grandpa, were you a hero in the war?”(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전쟁 영웅이었어요?) 그 손녀딸은 아마 자기 할아버지가 과거에 유명한 ‘전쟁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윈터스 소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No. But I served in the company of heroes.”(아니야. 난 그저 영웅들이 있는 중대에서 복무했을 뿐이란다.)
윈터스, 소령은 진짜 전쟁 영웅는 미군의 최고 훈장 중 하나인 은성무공훈장까지 받았던 자기가 아니라, 바로 이지중대에서 자신의 지휘를 따라 함께 싸웠던 모든 부사관과 병사들이었다고 자기 손녀딸 앞에서 회상했던 것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이 그와 똑같습니다.
언젠가 제게도 손자나 손녀가 생겨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훌륭한 목사님이었어요?’라고 물어올지도 모릅니다.
그런 날이 오면 저 역시 ‘아니야. 나는 훌륭한 목사 근처에도 못 갔어. 하지만 그 대신 정말 훌륭한 장로님들과 훌륭한 성도님들이 있는 경향교회에서 목회했단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경향교회 20년 사역을 통해 내세울 만한 열매는 거의 없고 그저 여러 차례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면서도 교회를 간신히 이만큼 수성해 낸 것이 전부이지만, 그것 역시 이처럼 지극히 연약하고 부족한 목사를 시마다 때마다 따뜻하게 격려하고 전심전력을 다해 지원해 주신, 정말 훌륭한 장로님들과 성도님들 덕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따른다.’라는 것이 그저 설교 시간에만 ‘아멘’ 하고 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훌륭한 교인은 ‘가르치는 장로’가 선포하는 말씀을 심령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신행일치의 충성으로 순종함으로써, 진정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려 하는’ 길로 ‘보내어 주는’ 든든한 후원자요 믿음직한 우군이요 생사를 같이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시작되는 경향의 새 시대에 담임목사님께서 추진하는 선한 일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헌금하고, 담임목사님께서 계획하는 모든 사역을 적극 지지하며, 또한 담임목사님과 동역하는 제신노회 산하의 모든 목사님과 선교사님과 신학교 교수님까지 성심성의껏 존중하고 대접함으로써, 단연코 지난 50년보다 갑절이나 더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경향교회의 미래를 꼭 함께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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